목록단상 (20)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은 너무 쉽다.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은 참 쉽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쩜 그렇게 쉽게 내뱉어 지는 지, 모르긴 해도 어쩌면 명언이라는 것도 다 그렇게 쉽게 나온 것은 아닐까. 좋은 책이라는 것들은 너무나 많고, 그보다 적긴 해도 좋은 구절도 참 많다. 좋은 노래도 많고 가사도 많고 아무튼 참 많다. 말로 지어진 너무나 많은 좋은 것들이 지금 마주보는 벽에도 다닥다닥 붙어있다. 어제 밤에 이런저런 걱정을 하다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터뜨리자마자 우는 것이 싫어 눈을 꾹꾹 누르면서 말은 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되었다. 교회를 다니면서, 말씀을 나누면서, 나는 참 가식적인 말을 많이 하고 있구나...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그..
그 정도로 못 쓴건가... 그 이유도 맞겠지만, 글들마다 서글픈 감정들이 들어앉아 있어 그런 것 같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지는 모르겠지만, 감성이 살아나는 순간은 대부분 어딘지 서글픈 생각이 많이 드는 날인 것 같다. 오글거리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은데 (정말로!) 꼭 이런 생각이 들 때 메모장을 많이 켜는 것 같다. 물론, 여름밤이나 화창한 오후에도 자주 메모장을 두드리는 것도 확실하지만... 지금은 도서관이고, 아이폰 날씨 어플이 예고한 대로 화창했던 한 시간 전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여기 친구들이 집을 좋아해서.. 여섯시가 넘으니 도서관에 앉아 있는 친구들도 별로 없다. 창문 밖으로는 건너편 법대 도서관 불빛에 밝혀진, 이제는 나뭇잎이 몇 장 안 남은 나뭇가지들이 ..
책상에 앉아 공부하기 전에 늘 들여다보게 되는 한 참 지난 달력이 있다. 탁상달력이고, 한 5년 전엔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지인이 주고 간 달력이었던 것 같다. 날짜는 4월 13일에서 넘어가지 않았다. 년도가 쓰여있지 않아 다행인데, 왜냐하면 달력이라는 것이 원래 해가 바뀌면 치워야 마땅한 물건임에도 년도가 없으니 그 자리에 몇 년 째 놓여 있으면 으레 생기는 죄책감 같은 게 없는 물건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침대나 전등이나 토너가 다 된 프린터나 책들처럼 먼지만 떨어내는 그런 가구가 되어 자리를 차지했다. 내 책상은 늘 볼펜으로 가득하고, 색연필도 한 다스, 읽던 책들이 여기저기, 그리고 학교노트들이 마구 쌓여 있는데다 이래저래 생각날 때마다 써 놓은 몇 년 째 묵은 포스트잇들도 아무대나 붙어 있어..
살다보니까. 절대 안 겪을 것 같던 일도 겪고 산다. 아직 서른도 안 되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쓰면서도 무슨 소리야 싶지만 그렇다. 가을날은 화창하고 커피머신은 아직 켜져있다. 커피를 내린 지 한 두시간 쯤 되었을거다. 바깥은 조용하고, 새도 아주 조그맣게 울고, 바람도 없어서 낙엽도 지지 않는 오후다. 한참 아미앵의 성서를 찾아보았는데 찾는 데 실패했다. 원래 분량이 한 장 정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디지털 시대라고 말하기에는 이 디지털이라는 단어도 하도 오래 되어서 촌스럽게 느껴지는데 아무튼 나는 이 시대를 사는 이십대 재빨라야 할 나이에 정보하나 제대로 못 찾는 뒤떨어진 젊은이다. 프루스트는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냈을까 했는데, 작가 소개를 펴보니 이렇게 쓰여있다. 1922-187..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보이는 것은 늘 다가 아니다.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어떤 사람이,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사는 방식이, 사교성이 없어보이는 사람의 친구가 몇 명이나 될 지는 보이는 대로 다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동네에나 살아보지 않고서는 바람이 어떤지 팔월의 햇살이 어떤지 눈이 자주 오는 편인지 얼만큼 쌓이는 지, 밤에 버스가 지나갈 때 주황 불을 켜는 지 노란 불을 켜는 지, 길가에 양귀비 꽃이 매 년 피는 지 대답 해 줄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하와이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래서 돌고래도 맨날 보고 가끔 지나가는 향유고래도 보고 지느러미만 보고 저 올카가 지미인지 톰인지 새라인지 맞추는 일상을 살았으면 하고 있다. 문득 문득 하와이언 ..
내가 존재하는 소리보다 이 공간을 더욱 채운 냉장고 소리. 이 방에는 냉장고가 살아있다. 나보다 더 강력히. 냉장고 소리에 파묻혀 누워있다. 여름 날에나 있는 일이다. 발콘 쪽 큰 문을 열어 두었는데도 빠져나가지 않는 냉장고의 목소리가 나를 쫓아내려 하는 건가. 열린 문으로는 아무도 나가지 않고 들어오기만 한다. 이상하게 꾸웩대는 새가, 올 해 희한하게 많은 벌이, 꼭 집 혼자 있으면 어느새 들어온 자동차가, 하늘에 날아가는 헬리콥터가 두두두두. 냉장고 소리에 묻혀 있다보니 귀를 스치는 파리 소리가 새삼 신선하다. 윙 윙 하는 소리가 엄청 좋은 헤드셋을 끼고 듣는 영화 속 액션 장면 같다. 왼쪽 오른 쪽 윙윙 하니 소름이 돋는 생생한 소리가 냉장고보다 내가 더욱 살았구나 하고 깨워내어서 세수를 하러 화장..
동생에게 주었던 오래 전 엠피쓰리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노래가 흘러 나온다. 십대 때 듣던 노래들. 랜덤으로 넘기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추억들이 떠올라서, 애틋했던 그 시절 동네가 그리워져서 사 분 남짓한 시간이 어느 여름 하루가 되고, 삼 분 이십초의 시간이 어린 가슴에 처음 닿았던 쓸쓸한 바람으로 분다. 부푼 마음을 안고 탔던 비행기 안에서 울며 들었던 그 노래가, 스무살의 처음 맞았던 타지에서의 생일 전 날 밤이, 휴일 오후 혼자 해 먹었던 볶음밥이 서러웠던 시간이, 어슴푸레하게 내려 앉은 공기를 마시며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어딘가라고 들떠하며 조용한 주택가 언덕길을 내려오던 날이 랜덤으로 넘어가는 트랙에 남아있다. 잊었는 줄 알고 늘 아쉬워했던 그 기억들이 아직 내 귀속에 남아서 뉴런들 사이사..
뜹뜨릅 씁쓸한 사이도 그냥 지나간 하루 사이에 용서할 수 있나보다. 지나간 일들이 생각 날 때마다 "그 인간... 그..... 그 자식......." 하던 일이, 언젠가라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던 그 일들이 그냥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니까... 사람이 나쁜 건 아니니까... 아닐테니까.... "잘 들어가세요. " 새벽녘 하늘을 등지고 인사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거구나. 살다보면 그런 일 들도 몇 시간 사이에 용서 할 수 있구나. 이래서 실천이 필요하다고 하는 거구나... 말로 백 번 용서 용서.. 말 하는 것 보다 한 번 이해해 보는 것이 옳은 거라고. 앞으론 마주쳐도 웃으며 인사해야 하겠지? 딱히 용서라고 말 할 만큼 계기가 있던 것도 사과를 받은 것도 아니지만. 그냥 이렇게 넘어가도 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