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기억 (4)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살다보니까. 절대 안 겪을 것 같던 일도 겪고 산다. 아직 서른도 안 되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쓰면서도 무슨 소리야 싶지만 그렇다. 가을날은 화창하고 커피머신은 아직 켜져있다. 커피를 내린 지 한 두시간 쯤 되었을거다. 바깥은 조용하고, 새도 아주 조그맣게 울고, 바람도 없어서 낙엽도 지지 않는 오후다. 한참 아미앵의 성서를 찾아보았는데 찾는 데 실패했다. 원래 분량이 한 장 정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디지털 시대라고 말하기에는 이 디지털이라는 단어도 하도 오래 되어서 촌스럽게 느껴지는데 아무튼 나는 이 시대를 사는 이십대 재빨라야 할 나이에 정보하나 제대로 못 찾는 뒤떨어진 젊은이다. 프루스트는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냈을까 했는데, 작가 소개를 펴보니 이렇게 쓰여있다. 1922-187..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보이는 것은 늘 다가 아니다.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어떤 사람이,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사는 방식이, 사교성이 없어보이는 사람의 친구가 몇 명이나 될 지는 보이는 대로 다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동네에나 살아보지 않고서는 바람이 어떤지 팔월의 햇살이 어떤지 눈이 자주 오는 편인지 얼만큼 쌓이는 지, 밤에 버스가 지나갈 때 주황 불을 켜는 지 노란 불을 켜는 지, 길가에 양귀비 꽃이 매 년 피는 지 대답 해 줄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하와이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래서 돌고래도 맨날 보고 가끔 지나가는 향유고래도 보고 지느러미만 보고 저 올카가 지미인지 톰인지 새라인지 맞추는 일상을 살았으면 하고 있다. 문득 문득 하와이언 ..
내가 존재하는 소리보다 이 공간을 더욱 채운 냉장고 소리. 이 방에는 냉장고가 살아있다. 나보다 더 강력히. 냉장고 소리에 파묻혀 누워있다. 여름 날에나 있는 일이다. 발콘 쪽 큰 문을 열어 두었는데도 빠져나가지 않는 냉장고의 목소리가 나를 쫓아내려 하는 건가. 열린 문으로는 아무도 나가지 않고 들어오기만 한다. 이상하게 꾸웩대는 새가, 올 해 희한하게 많은 벌이, 꼭 집 혼자 있으면 어느새 들어온 자동차가, 하늘에 날아가는 헬리콥터가 두두두두. 냉장고 소리에 묻혀 있다보니 귀를 스치는 파리 소리가 새삼 신선하다. 윙 윙 하는 소리가 엄청 좋은 헤드셋을 끼고 듣는 영화 속 액션 장면 같다. 왼쪽 오른 쪽 윙윙 하니 소름이 돋는 생생한 소리가 냉장고보다 내가 더욱 살았구나 하고 깨워내어서 세수를 하러 화장..
동생에게 주었던 오래 전 엠피쓰리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노래가 흘러 나온다. 십대 때 듣던 노래들. 랜덤으로 넘기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추억들이 떠올라서, 애틋했던 그 시절 동네가 그리워져서 사 분 남짓한 시간이 어느 여름 하루가 되고, 삼 분 이십초의 시간이 어린 가슴에 처음 닿았던 쓸쓸한 바람으로 분다. 부푼 마음을 안고 탔던 비행기 안에서 울며 들었던 그 노래가, 스무살의 처음 맞았던 타지에서의 생일 전 날 밤이, 휴일 오후 혼자 해 먹었던 볶음밥이 서러웠던 시간이, 어슴푸레하게 내려 앉은 공기를 마시며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어딘가라고 들떠하며 조용한 주택가 언덕길을 내려오던 날이 랜덤으로 넘어가는 트랙에 남아있다. 잊었는 줄 알고 늘 아쉬워했던 그 기억들이 아직 내 귀속에 남아서 뉴런들 사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