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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찹잘한 냉장고 소리

MedHase 2015. 8. 9. 07:21

내가 존재하는 소리보다 이 공간을 더욱 채운 냉장고 소리.
이 방에는 냉장고가 살아있다. 나보다 더 강력히.
냉장고 소리에 파묻혀 누워있다. 여름 날에나 있는 일이다. 발콘 쪽 큰 문을 열어 두었는데도 빠져나가지 않는 냉장고의 목소리가 나를 쫓아내려 하는 건가.

열린 문으로는 아무도 나가지 않고 들어오기만 한다.
이상하게 꾸웩대는 새가, 올 해 희한하게 많은 벌이, 꼭 집 혼자 있으면 어느새 들어온 자동차가, 하늘에 날아가는 헬리콥터가 두두두두.
냉장고 소리에 묻혀 있다보니 귀를 스치는 파리 소리가 새삼 신선하다. 윙 윙 하는 소리가 엄청 좋은 헤드셋을 끼고 듣는 영화 속 액션 장면 같다. 왼쪽 오른 쪽 윙윙 하니 소름이 돋는 생생한 소리가 냉장고보다 내가 더욱 살았구나 하고 깨워내어서 세수를 하러 화장실 환풍기 소리를 내러간다. 혼자 있어도 시끄럽다.

뚝 냉장고가 소리내기를 멈춘다. 이 틈에 어서 무언가 아주 델리케이트 한 것을 해야해. 조급해지는 마음에 오히려 불안하다. 운현궁의 봄을 떠올리며 창덕궁 비원을 떠올리며 가까이서 들어보지도 못한 가야금 소리를 떠올리며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다가 칼이 운다는 칼의 노래를 떠올리며 마침내는 바다에 부딪치는 배 밑바닥을 떠올린다. 배가 바다위에 철척철척 붙었다 떨어지는 그 순간이 얼마나 긴박한지 숨을 고르고 그 찰나를 떠올린다. 글을 쓰는 손이 그 박자에 안 맞아서 코에 땀이 나도록 조급해진다.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숨을 골라야 하고 냉장고 소리가 다시 날까봐 언제 울릴지 모르는 타이머를 든 양 맘이 조이는 것이다. 윗 집 청년이 샤워를 하는 지 늦은 오후에 물 내려 가는 소리가 들리니까, 언제 들어도 짜증나는 오토바이 부와앙 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이용이용하는 구급차 소리를 들으니까 냉장고 소리를 까먹고 다시 맘이 부드러워 진다. 하지만 내가 방심 할 때 언제부터 다시 내기 시작했는지 몰랐던 이 냉장고 놈이 다시 우이이잉 한껏 소릴 내지르고 있겠지. 긴장상태다.이 놈이 소리를 낼 때는 언제 멈출까 그 타이밍을 기다리느라, 조용할 때는 몇 분간 다시 조급하게 무언가 몰두하다가 이내 두런두런 나는 소리들에 마음이 풀렸다가...
냉장고가 아직도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언제 또 소리를 낼 지 모르니 나는 얼른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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