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응달에 선 나무는 낙엽도 더 늦게 지는가. 본문

단상

응달에 선 나무는 낙엽도 더 늦게 지는가.

MedHase 2016. 4. 27. 07:28

응달에 선 나무는 낙엽도 더 늦게 지는가.

4월이 벌써 반이나 지났다. 그만큼 봄이 더 발랄해져 간다. 오스터 글로케* 가 긴 겨울을 녹이며 회색빛 거리에 봄의 노랑색 기대를 부풀리더니, 고등학교 시절 교목이서인지 늘 새 시작을 알리는 듯 풋풋한 목련이 이파리도 나지 않은 가지에 그렇게나 가득 피어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벚꽃이 분홍 빛 설렘으로 거리를 물들인다. 좋은 기억도, 생각하면 한없이 슬픈 기억도 꽃송이들과 함께 봄바람에 흔들려 떨어진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진득히 한 주도 채 즐기지 못했는데 변덕스런 아프릴베터에 벚꽃은 아쉽게 흩어져 버린다. 어느 계절보다 빨리 지나가버리는 봄이 아쉬워 질 때. 그 때가 비로소 겹벚꽃나무의 시간이다. 많은 봄꽃들이 아쉽게 지는 4월 중순에 다른 꽃들보다 해를 더 모아 기다린 듯, 사랑스러운 이 나무는 깊은 분홍물을 들인 짙고 화려한 꽃을 송이송이 흐드러지게 피워낸다. 하지만 이 솜사탕같은 꽃들도 일주일만 지나면 벌써 다음 해를 기약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봄은 너무 짧다.

모든 풀꽃들과 나무들이 봄을 맞이한다. 겨울이 가고 봄이오면 늘 푸른 침엽수들 마저 새 싹을 틔워 원래 잎들보다 연한 잎새들을 내고야 마니까. 그런데 이렇게 활기찬 봄, 꽃이 질까 부랴부랴 꽃놀이를 가는 기차 안에서 이 봄까지 지지 않은 나뭇잎을 달고 있는 나무들을 발견하고 말았다. 아프릴베터를 맞으며 다른 나무들이 새싹을 돋우는 시간에 아직 채 떨구지 못한 나뭇잎을 달고 봄 비 속으로 손을 뻗는 몸통보다 검은 가지들이 있었다. 기찻길 옆 비탈진 굴다리 옆 응달에 선 나무. 모든 다른 나무들은 연두 빛 새싹을 둘러 갈 시간에도 아직 지난 겨울에서 헤어나지 못 한 듯 계절을 멈추는 나무들이었다. 핸디 메모장을 누르며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며칠간 우박과 햇살이 반복되는 창가를 어슬렁대며 키보드를 두드렸지만 영 정리가 되지 않았다. 머리속을 맴도는 계절을 붙잡고 시간을 끄는 나무들이 성가셨다. 이 활기차고 영롱한 봄에 도대체 왜 아직 겨울을 붙잡고 발랄해지려 하는 내 마음을 덩달아 서글프게 하는 지 '응달에 선 나무, 응달에 선 나무'를 떠올리며 도무지 다른 글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다시 시작 된 새학기 시간표를 보며 응달에 선 나무가 왜 그렇게 마음에 걸렸는 지 이제야 인정하게 된다. 왠지 비슷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다 봄인데 왜 늦게 싹을 티워야 하는 지 '늦다'라는 한 단어가 걸려서 안 넘어 갔던 것이다. 다시 키보드를 꺼냈다. 어쩔 수 없다. 솔직해지자. 슬슬 무언가 나올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햇살이 닿는 따뜻한 양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절을 바라보며 때를 늦추며 기다린다. 계절은 늘 그렇듯 지나갈 것이다. 아직 싹이 트지 않았지만 나무들은 끝끝내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초록색 잎에 서서히 물을 들여 갈 것이고 결국 열매도 맺을 것이다. 지난 봄에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겨울이 남긴 마른 잎들이 달려 있는 것일 것이다. 처음엔 영 봄에 어울리지 않는 장갑을 낀 듯했던 가지들이 한 여름 소나기가 내린 민소매를 입은 어깨 같다는 이미지로 바뀐다. 왠지 내가 힘이 나는 것 같다. 응달, 겨울. 봄에 어울리지 않는 칙칙한 단어들이 이 나무들을 만나 힘으로 다가온다. 그러고보니 Aprilwetter**는 어쩌면 이 나무들을 위해 있나보다. 미친 4월 이라고 불리지만 다시 들여다 보아야 할 일이다. 천천히 시작하는 응달에 선 나무들을 위한 한 달 동안의 사려깊은 배려일지도 모르니까. 양지에 선 나무들이 앞다투어 잎을 내고 꽃을 피울 때, 우박을 내리고 겨울 같이 찬 바람을 보내며 응달에 선 나무들을 응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는 봄이여
머뭇거리며 피는
철 늦은 벚꽃

부손

머뭇거리며 피는 철 늦은 저 귀여운 벚나무는 어쩌면 응달에 서있었을지도...

분명 여름은 올 거다. 그렇다면 여름의 길목에서 봄은 한 층 더 따뜻해 질 것이고, 바람도 더욱 햇살을 품어 응달에 선 나무의 기찻길 굴다리도 데울만큼 따뜻해 질 것이다. 덕분에 이 기찻길을 오가며 조금 더 긴 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봄은 아직도 시작이다. 야호-








*'부활절 종'이라는 뜻으로 수선화
**'4월의 날씨'라는 뜻으로 변덕스런 4월의 독일 날씨. 미친 4월 이라고도 불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