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상대적 박탈감' 이라는 말. 본문

단상

'상대적 박탈감' 이라는 말.

MedHase 2016. 11. 25. 03:38

그 말이 싫다.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젊은 세대가 분노한다는 뉴스는 맘에 들지 않는다. 분노의 제목은 그것이 되어서는 안되었다. 더욱이 뉴스의 제목은 그것이 되면 안되었다. 늘 분노보다 앞서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분노가 이는 것은 매사에 막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 되는 가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어떠한 일을 이루거나 망치는 일에 기여하는 큰 요소가 감정이니 당연히 감정을 드러내는 데에 올바른 이유를 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기쁨, 환희, 행복 처럼 긍정의 감정이 아니라 화, 분노, 슬픔, 통탄 이라는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데에야 오죽 하겠는가.

'화'는 대부분 많은 것을 어그러뜨린다. 올바른 대의를 가지고 시작해도 화 때문에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느 대학생의 인터뷰 였다. "우리들이 이렇게 열심히, 이렇게 힘들게 공부하고 이렇게 힘들게 일하면서 얻는 것들을 저 사람들은 저렇게 쉽게 저렇게 어이없게 얻는 다는 것이 불공평해서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고 그것에 많은 저희 또래들이 분노 하고 있습니다."

심정적으로 감정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상대적 박탈감'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양심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들은 도의적으로도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했고, 객관적으로 최소한의 법을 지키지 않았다. 태평성대에도 누구는 박탈감을 느낀다. 도의적으로 완벽한 시스템이 그대로 돌아간다고 해도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낀다. 모두가 원하는 것을 얻고, 원하는 일을 하고 합당한 임금을 받아도 박탈감은 찾아 올 것이다. 남의 떡은 늘 커보인다. 그러니까 상대적이라는 말은 말 어떻게 보면 어느 상황에서든 늘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내는 분노가 이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것에서 오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에서 기인한 분노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가 악하기에 만들어 놓은 최소한의 도덕, '법' 이 지켜지지 않아서, 그보다도 깊숙이 어릴 적 부터 스스로 느껴온 '양심'이라는 것이 없어 한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행태를 보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상대적 박탈감, 그들보다 내가 가진 것이 덜해서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