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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아헨에 이사 온 지 6 개월. 연애할 때는 서로 다른 도시에 살아 함께 하지 못 했던 일들을 매일 하나씩 하나씩 더 하게 된다. 결혼 전에는 저녁이면 페이스타임을 틀어놓고 "같이 가고 싶다. 여기 앞에 큰 장이 열렸어." "오늘 눈이 올 것 같아. 같이 나가보면 좋을텐데." "오늘 시내에 와인축제가 열렸어. 재밌긴 하더라. 같이 가면 좋을텐데.. 주말이면 끝난대." 하며 아쉬워하는 대신 작은 카페를 발견하거나, 새로운 파스타 집을 발견하면 더 기다리지 않고 오늘 점심에 잠깐, 오늘 저녁에 여유롭게, 이번 주말에 마음 놓고 쭉- 마음 놓고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역시 신혼부부에게 가장 와닿는 즐거움이다. 그럴 때마다 결혼을 했구나. 실감하며 감사하게 된다. 유난히 더웠던 올 해 여름, 일을 마치고 온 남편..
"고모 이사 갈 지도 모른다. 이번엔 크리스마스 카드 보내지 말아라. 알겠재?" 몇 년이나 된 걸까. 카드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 아빠가 꼭 한 해에 한 번, 최소한 성탄카드는 보내는 것이라고해서 매 년 성탄 연하장을 사러 다녔다. 어렸을 적부터 였다고는 해도 어른들께 제대로 된 카드를 보내기 시작 한 것이 벌써 15년 정도가 되었겠구나...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3년 정도는 빼먹지 않고 보내던 카드를 올 해엔 보내지 않기로 했다. 고모의 메시지가 없었어도 어차피 보내지 않으려 했는데, 이번엔 못 받을 지도 모르니 카드를 보내지 말라는 고모의 메시지가 온 것이다. 늘 날짜를 지키지 않거나, 게으름을 부리며 카드를 쓰지 않고 있는 것이 들키면 "일 년에 한 번 성탄카드 보내는 일이 뭐 그리 어려운 일..
마음대로 살 수가 없다 아마 그 누구도 마음대로 살 지 못 할 거다. 마음대로 산다는 것이 도대체 뭐기에- 왜 자꾸 누구는 마음대로 살으라 하고, 또 누구는 마음대로 살지 마라, 또 누구는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작아지는 것일까. 나는 마음대로 살고 있지만, 또 마음대로 살지 못해서 도무지 마음대로 마음만큼 살 지 못한다. 마음대로 글을 쓰고 싶지 않지만, 그 역시 마음대로라서 사람마다 마음이 다 달라 결국엔 '니 마음만 있냐 내 마음도 있다.' 라고 유치한 싸움이 시작된다. 존 러스킨도 마음대로 결국엔 살았구나 싶고, 그렇다고 파스칼이 마음대로 안 살았겠냐는 생각을 해 본다. 몽테뉴는 그 어딘가에서 결국은 마음대로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모든 것이 한계가 아니겠느냐 하는..
그 말이 싫다.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젊은 세대가 분노한다는 뉴스는 맘에 들지 않는다. 분노의 제목은 그것이 되어서는 안되었다. 더욱이 뉴스의 제목은 그것이 되면 안되었다. 늘 분노보다 앞서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분노가 이는 것은 매사에 막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 되는 가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어떠한 일을 이루거나 망치는 일에 기여하는 큰 요소가 감정이니 당연히 감정을 드러내는 데에 올바른 이유를 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기쁨, 환희, 행복 처럼 긍정의 감정이 아니라 화, 분노, 슬픔, 통탄 이라는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데에야 오죽 하겠는가. '화'는 대부분 많은 것을 어그러뜨린다. 올바른 대의를 가지고 시작해도 화 ..
폭- 작약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깨다. 매년 5-6 월이 되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색색깔 작약 덕분이다. 베이비핑크색부터 연어색이 비치는 분홍, 쨍하게 빛나는 마젠타빛깔, 동화속 공주님 치맛단 같은 하얀 겹꽃잎들을 보고있으면 늘어져 있던 공기가 금방 맑아지는 듯 하다. 길거리에 벌여놓은 꽃 노점상을 지나가는 일은 그래서 더욱 즐겁다. 특히 요즘은 지날 때마다 한아름 꽃을 사고 싶어서 한참 구경 하곤 한다. 가끔은 한 두 단 씩 집어 오기도 하는데, 작약을 살 때마다 꼭 이야깃거리가 생겨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린다. 늘 그렇듯 작약을 사들고 집에 오면 작은 방에는 좀 과하다 싶은 긴 꽃병을 찾아 즐거이 씻는다. 남자친구가 작약을 꽂으려면 이렇게 긴 꽃병이 필요할 것 같아..
핑계거리는 많았다. 할 이유도 많았다. 그리고 하지 못할 이유도 많았다. 늘 두 가지 이유가 얽혀 스트레스로 마음을 짓누른다. 어째서 나이가 들수록 하나만 싫은 게 없을까. 뭐든 좋게만 보이고 낭만적으로 보이던 많은 일들에서 실망할 수 있는 문제점들을 발견한다. 혼자 다니는 여행은 자유롭고 새로운 경험을 누구의 조언도 없이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늘 설레던 것 이었는데, 어느덧 너무나 위험하며 어떨 땐 그 자유가 외로움이 될 수 있다는 점 등등의 이유로 망설여 진다. 타자기를 두드리며 글을 쓰는 일은 또 언제나 즐거운 일 이었는데 어느 순간 이 시간에 차라리 전공서적을 봐야할 것 같고, 다른 공부를 하는 것이 낫겠다는 핑계뿐인 게으름에 생기를 잃어간다. 모든 것이 신나는 일이었는데 그 중 많은 일이 귀..
응달에 선 나무는 낙엽도 더 늦게 지는가. 4월이 벌써 반이나 지났다. 그만큼 봄이 더 발랄해져 간다. 오스터 글로케* 가 긴 겨울을 녹이며 회색빛 거리에 봄의 노랑색 기대를 부풀리더니, 고등학교 시절 교목이서인지 늘 새 시작을 알리는 듯 풋풋한 목련이 이파리도 나지 않은 가지에 그렇게나 가득 피어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벚꽃이 분홍 빛 설렘으로 거리를 물들인다. 좋은 기억도, 생각하면 한없이 슬픈 기억도 꽃송이들과 함께 봄바람에 흔들려 떨어진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진득히 한 주도 채 즐기지 못했는데 변덕스런 아프릴베터에 벚꽃은 아쉽게 흩어져 버린다. 어느 계절보다 빨리 지나가버리는 봄이 아쉬워 질 때. 그 때가 비로소 겹벚꽃나무의 시간이다. 많은 봄꽃들이 아쉽게 지는 4월 중순에 다른 꽃들보다 해를..
Meyersche 책방 3층 창가. 아헨에 이런 곳이 있다니. 그래도 일 년을 정 붙이며 오간 도시인데 이런 곳을 이제야 알다니 역시 가끔 일상을 넘을 줄 알아야 한다니까. 돔 공사만 끝나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슬아슬한 지붕 꼭대기에 앉아 간식을 드시는 인부 아저씨도 관찰 할 수 있고, 아이스크림가게 노천에 앉은 사람들, 새싹마저도 붉은 단풍나무, 폴리우레탄 바닥에 세워진 작은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과 엄마 아빠들, 선물가게앞에서 카드를 고르는 사람들의 쇼핑백, 지나가는 쓰레기 차가 이 거리에 멈추는 횟수 등을 마음껏 관찰 할 수 있는 창가를 발견했다. 그러고보니 저 아이스크림 집은 처음 아헨에 온 겨울 날 카푸치노를 마셨던 그 아이스 집이구나. 그 날은 생각보다 추웠고 해도 일찍 져서 사람도 없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