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폭- 작약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깨다. 본문

단상

폭- 작약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깨다.

MedHase 2016. 6. 7. 22:30

폭- 작약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깨다.



매년 5-6 월이 되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색색깔 작약 덕분이다. 베이비핑크색부터 연어색이 비치는 분홍, 쨍하게 빛나는 마젠타빛깔, 동화속 공주님 치맛단 같은 하얀 겹꽃잎들을 보고있으면 늘어져 있던 공기가 금방 맑아지는 듯 하다. 길거리에 벌여놓은 꽃 노점상을 지나가는 일은 그래서 더욱 즐겁다. 특히 요즘은 지날 때마다 한아름 꽃을 사고 싶어서 한참 구경 하곤 한다. 가끔은 한 두 단 씩 집어 오기도 하는데, 작약을 살 때마다 꼭 이야깃거리가 생겨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린다.
늘 그렇듯 작약을 사들고 집에 오면 작은 방에는 좀 과하다 싶은 긴 꽃병을 찾아 즐거이 씻는다. 남자친구가 작약을 꽂으려면 이렇게 긴 꽃병이 필요할 것 같아서 사왔다는데 볼 때마다 과해서 평소엔 먼지만 쌓여있지만 작약을 사온 날은 대우가 달라진다. 즐거이 꽃병을 씻은 후엔 손도 다 안 말린채로 책상에 그득히 펼쳐진 작약 송이 줄기들을 조심스레 가위로 조금 잘라준다. 이 작업을 하다보면 줄기에 붙은 잎들도 좀 떼어야 해서 늘 바닥이 어질러 지고, 또 굵은 줄기를 자르다 사방으로 튀기도 하지만 치우는 것이 전혀 귀찮지 않다. 그다음으로 예쁘게 다듬은 꽃송이들을 곁들여 사온 다른 꽃들과 조화롭게 섞어 조심조심 꽃병에 꽂는다. 글을 쓰면서도 왠지 리듬이 느껴지는 것이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올 해엔 새로이 스위트 피에 꽂혀 있던 터라 연분홍 작약과 연보라빛 스위트피를 섞어 사왔다. 이제 마지막, 다 꽂아진 다발을 예쁘게 정리해 주면 일주일동안 행복해 지는 5월의 작약 꽃병이 완성된다. 밥 먹을 때도 왠지 더 기분이 좋고, 커피를 마실 때도, 환기를 시키려 창문을 열어도 싱그러운 향기가 주변을 채우니 절로 스트레스가 풀리는 듯 하다. 집에 돌아와 아무도 없는 방 불을 켤 때면 가끔은 쓸쓸한데, 이렇게 예쁜 작약 꽃병이 반겨주면 기분이 좀 다르다. 그렇게 몇일 동안 기분을 띄워주던 작약들이 오늘 아침, 안그래도 평소보다 바쁜 아침에 또 일을 냈다.
사실 예고 되었던 일이었다. 작약을 산 지 한 4일 되는 날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약은 늘 예상할 수 없는 타이밍에 갑작스럽게 일을 낸다. 오늘따라 중요한 세미나가 있어서 일찍 일어나 분주히 준비하려고 알람을 맞춰놓았었다. 이런 날엔 일부러 좀 더 일찍 알람을 맞춰놓고 '아 딱 20분만...' 하며 이불속에서 밍기적 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역시 준비하려는 시간보다 한 30분 일찍 알람을 맞춰놓았다. 새벽 6시 30이 되어서 알람이 울렸고 당연히 눈도 못 뜬 채로 알람을 끄고 아 십분만..이십분만...하는 잠이 덜 깬 아침, 새소리와 어슴푸레 밝아온 창밖이 이불속을 더 포근하게 만든다. 꼭 이렇게 특별한 스케줄이 있어 일어나야 할 때는 침구가 얼마나 보드라운지 썸머타임이 얄미워진다.

그런데 폭- 꽃잎이 수수수 떨어진다. 폭-

정신이 바로 차려진다. 이렇게 떨어진다는 건...... 위험한데-
돌이켜 생각하면 꽃잎이 바닥에 떨어지는 건데 좀 더 놔두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게 예뻐하던 작약 꽃잎이 좀 떨어진다고 우당탕탕 꽃 다발을 들고 화장실로 뛰어가다니 좀 아이러니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늘 나중이다.
사실 작약은 지는 것도 참 예쁘다. 폭- 아침에 작약이 지는 소리에 잠을 깨다니 그것도 기분이 좋긴 했지만 결국 언제나처럼 헐레벌떡 꽃병을 들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 많은 꽃잎들이 폭- 폭- 쏟아져 내렸다. 아침에 할 일도 많은데... 급하게 꽃잎들을 모으면서는 별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모아도 모아도 쏟아져 내린 꽃잎들이 두손 가득 몇 번이나 모였다. 보드라운 꽃잎들을 버리면서 아쉬웠지만 아침의 일상이 그렇듯 분주함속에 금방 잊혀졌다.
그런데 폭- 도서관에 앉아 있는데, 폭- 작약이 졌다. 아침에 침대 옆에 놓인 조그만 탁자에 올려져 있던 올 해의 작약이, 그러고보니 눈 앞에서 폭- 꽃잎을 떨어뜨렸다. 제 작년에도 작약이 지는 소리를 들었었다. 한참 자고 있는데 폭- 그리고 수수수수수- 하던 소리가 나 불을 켜 보니 그 때도 자주빛 작약이 꽃잎을 그렇게 모두 쏟아내 놓았었다. 그 날은 너무나 아쉬워서 남은 작약 꽃들을 챙겨 기숙사 앞마당에 뿌려 놓았었더랬다. 그러나 그 다음 몇 번은 내가 집에 없을 때 져 버렸는지, 돌아와 불을 켜면 온 바닥에 쏟아진 꽃잎들과 아직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곧 쏟아지려 하는 꽃송이들을 재빠르게 날라, 처리했던 것 같다. 늘 그렇게, 겹겹이 사랑스럽던 꽃잎들을 미련없이 폭- 폭- 쏟아내 버리는 작약의 쿨함 덕에 이 꽃송이들을 버리던 날은 늘 난리통으로 기억되고, 거기에 그 날 있던 일들이 엮여 이야기가 되어온 것이다.

그리고 오늘.
폭- 꽃잎을 쏟아내던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어릴 적 살던 바닷가 집에 마당이 있었는데 참 예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골목만 들어서도 향기가 났던 천리향나무, 여름마다 과일이 좀 잘 자라길 걱정했던 석류나무, 꽃이 참 예쁜데 열매까지 따서 매실청을 담았던 매실나무, 아빠가 집에서도 곶감을 만들어 주겠다며 주렁주렁 열린 감들을 엮어 두었는데 결국엔 온통 곰팡이가 슬어 실패했지만 늘 꼭대기에 남은 감들로 오가는 새들에게 겨울까지 양식을 나누어 주던 감나무, 여름이면 파라솔을 펴고 하루종일 앉아 그림으로 그리던 주황색 나리들, 늘 까먹고 있다 강아지를 따라다니며 발견하는 반가운 찔레꽃덩쿨, 너무 커서 결국 반 쯤 베어야했던 개잎갈나무-히말라야시다-, 그리고 한 여름 온 종일 마당에서 놀며 화단에 물을 줄 때마다 그 큰 꽃송이에 방울방울 물방울을 모으던 모란이 있었다. 그 모양이 얼마나 예쁜지 계속 물을 틀어 놓다가 혼이 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모란은 작약과 식물이다. 어렸을 때 그 자주색 모란이 활짝 피면 내 두 손 바닥보다도 커서 꽃을 어루만지면 두 손 가득 담긴 꽃잎이 정말 탐스러웠다. 또 노란 꽃가루도 어마어마해서 만지고 나면 늘 온 손에 노란 꽃가루가 묻어났다. 가끔 엄마 몰래 모란을 따서 동생과 돌로 꽃잎을 찧다 옷을 물들이곤 했는데 그 때마다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해가 지도록 열중하던 놀이에 재료를 제공해 준 것도 모란이었다. 그러다 여름이 기울고 모란이 지기 시작하면 아침에 등교 할 때마다 수북히 쌓인 꽃잎이 아깝기도 하고 아쉽기도 해서 모아 놓기도 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어느날 아침, 그 큰 모란이 툭- 하고 지던 소리를 잊고 있었는 줄 알았는데, 오늘 작약이 지는 소리에 폭- 하고 모란이 지던 마당있는 집이 떠올랐다.

비행기로 11시간 떨어져 있는 도서관에서, 폭- 작약이 지는 소리에 그 여름날 파라솔 밑에서 하루종일 놀던 날들이 떠올랐다. 모란이 툭- 지는 소리에 또 어느 여름 날 엄마가 끓여 주었던 제첩국 맛이 떠오른다. 초여름까지 제철이라는 슈파겔(아스파라거스)* 대신 돔마켓이 열리는 토요일에 겹겹의 꽃잎사이마다 기억을 머금은 작약 한 다발을 더 사 와야겠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중 대사 "기억을 없애는 아스파라거스"
아스파라거스가 이뇨작용을 높이기 때문이겠죠. 재미있는 대사였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