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산책 나가지 못하는 오후의 심란함. 본문

단상

산책 나가지 못하는 오후의 심란함.

MedHase 2016. 4. 15. 07:29

산책 나가지 못하는 오후의 심란함.

팡세 269(139), 267


못 나가게 붙잡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날씨도 좋고, 이제 바람도 따뜻한 느낌이고, 몸이 안 좋은 것도 아니며 더구나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도 잠깐의 산책이 오늘따라 번거롭게 느껴진다. 항상 가벼운 마음으로 나가던 산책이 이렇게 좋은 봄 날 망설여 지다니. 기분이 영 상쾌하지 않다. 구시가 성벽길의 나무에도, 동네 가로수에도, 자잘한 풀꽃들에도 봄이 왔다. 봄은 역시 땅에서부터 오는 지 구석구석 귀여운 새싹들이 돋았다. 봄이 올 때마다 늘 가던 길을 멈추고 소란스레 감탄을 해대며 사랑스러워하던 그 새싹들일 것이다. 그런데 올 봄, 이 화창한 오늘, 산책이 이렇게나 망설여지는 것이 이상스러워 생각을 하던 중 내 마음 어딘가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것은 새싹이었다. 너무나도 사소하지만 종종 길을 걷다 갸우뚱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새싹의 빛깔'. 그게 달랐다. 지금껏 싱그럽고 사랑스레 솟아난 발랄한 연두빛 새싹들에 마음을 주며 예쁘다 귀엽다 싱그럽다 소란을 떨며 봄을 맞이 했는데, 올 봄엔 요 귀여운 연두새싹보다 수줍은 듯 가녀리며 도도함을 풍기는 회연두빛의 새싹을 지그시바라보는 일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올 봄은 어쩜 이렇게 조용히 왔을까' 하는 생각을 더 자주 했던 것 같다.

결국 산책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페스토 스파게티를 분주히 만들어 앉았다. 이 조용한 봄의 오후에 집에서 혼자 페스토 스파게티를 먹었다. 그리고 팡세를 펴고 읽기 시작했는데, 늘 그렇든 첫 문장부터 불안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제 8 장. 위락.

.....[중략] 사람은 죽음과 비참과 무지를 치유할 수 없으므로 자기의 행복을 위해 이것들을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중략]...... 그 어떤 신분을 상상해 보더라도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모든 행복을 한 곳에 모은다면 왕위야말로 이 세상의 가장 훌륭한 자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왕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만족에 에워싸여 있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그에게 위락이 없다면 그리고 그가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각 무엇인지를 생각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이 맥빠진 행복은 그를 지탱하지 못할 것이고 또 그는 언제 일어날 지 모를 반란, 끝내는 피할 수 없는 병고와 죽음 등, 그를 위협하는 이 모든 것들과 필연적으로 마주칠 것이다. 그 결과 위락이라 불리는 것이 없다면 그는 불행하며, 놀고 즐기는 가장 미천한 신하보다 더 불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유일한 행복은 자신의 조건을 생각하는 것에서 마음을 돌아서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을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 어떤 활동에 의해서나 아니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즐겁고 새로운 정열...... [중략] 사람들이 찾는 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불행한 조건을 생각하게 하는 맥빠지고 평온한 관습적 삶이 아니고 또 전쟁의 위험이나 직무의 노고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에서 마음을 돌아서게 하고 우리의 기분을 전환시키는 소란, 바로 이것이다.

이번 봄은 참 조용히도 왔다. 다시 말해 나에게도 소란이 필요하다는 뜻인가.
당장 차를 내리고 텀블러를 꺼내 밖으로 나갔다. 역시 길을 걸으며 꽃을 보고 작은 새들을 관찰하고 귀여운 새싹들을 보며 으레 떨던 소란을 떨었더니 마음이 좀 상쾌해 지는 듯 했다. 물론 여느 봄과는 다르게 그 귀여운 연두빛이 한 없이 말갛게만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은 그대로 였지만-
고민을 더 해볼까 하던 차, Max&Morritz 빨간 그릴치킨 차가 눈에 들어왔다. 스파게티는 어느새 소화가 되었는지 저녁으로 그릴치킨 반 마리와 양배추샐러드를 들고 산책에서 돌아왔다. 무엇 때문에 연두 새싹보다 회연두 새싹이 뭉클하게 다가오는 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치킨을 맛있게 먹고나니 새싹 색깔이야 취향이 좀 바뀐거 아니겠나 싶어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소란스레 마음을 가라앉히고 회연두빛의 마음으로 다음 문단을 읽기로 했다.

....[중략] 그러나 만약 이렇게 자신을 낮추지 않고 늘 긴장을 유지하려 한다면 그것은 인간을 초월하려는 것이므로 그는 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다. 결국 그는 한 인간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작고도 크고, 전부이자 무( )다. 그는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오로지 인간이다.
....[중략] 인생은 온통 이렇게 흘러간다. 사람들은 장애물과 싸우면서 안식을 찾는다. 그러나 이 장애물을 극복한 다음에는 안식이 낳는 권태로 인해 이 안식이 참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거기서 빠져나와 소란을 구걸해야 한다. 소란과 위락 없이는 어떤 신분도 행복할 수 없고, 어떤 위락이건 즐기고 있을 때에는 모든 신분이 행복하다. (그러나 자기를 생각하는 것에서 마음을 전환시키는 것으로 성립되는 이 행복이 과연 무엇인지 판단하여 보라.)

나는 늘 그렇듯 어쩔 수 없는 모자람을 깊숙이 삼킨다.
조용히 온 봄을 맞아 불안해 하며 연두빛 소란에서 안정과 행복을 찾다 그릴치킨과 양배추 샐러드 앞에서 즐거이 회연두색 마음을 까먹었다.